리믹 [374752] · MS 2011 · 쪽지

2023-12-28 05:02:41
조회수 18,643

다른 곳에도 올렸던, 여자에 미쳐 수능을 준비했던 30대 아재의 수능 도전기

게시글 주소: https://ui.orbi.kr/00066195240


안녕하세요. 늦은 밤 잠은 안 오고, 제 인생 썰이나 한번 풀어보려 합니다.


저는 2017년, 대학을 졸업한 이후 쭉 여의도 정치권에서 근무했습니다. 국회에서, 당에서, 정책연구원에서요.


한때는 제 꿈이 대통령이기도 했고, 정치권의 경험을 한번 쌓아 보고자 들어간 것이었는데, 어쩌다보니 생각보다 꽤 긴 시간을 여의도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뭐 우선, 여의도 근무로 얘기하자면 그렇게 근무 환경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제가 2017.1~2022.8까지 근무했는데, 실업급여 수급 횟수가 3회...ㅎㅎ 아무래도 거대정당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것이 아니다보니, 정치 환경에 따라서 하루아침에 백수가 되는 일도 일상 다반사로 벌어지는 그런 곳이지요. 그렇다고 연봉이 막 많이 높은 것도 아닙니다. 제가 퇴직 직전 받던 계약연봉은 4000만원 중반대 정도였으니까요.


안정적이지도 않으면서, 고연봉도 아닌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2021년 서울과 부산에서 시장 재보궐 선거가 있었지요. 그리고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까지 이어지는 선거 일정이 있었구요. 저는 이때문에 2020년 말부터 주7일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포괄임금제로 인하여 근무시간이 많아진다고 월급이 많아지는 것은 아니었는데, 회사 내에서 유일한 미혼 남성이었다는 이유로, 매주 주말마다 부산에 출장을 갔다가, 좀비 상태로 평일에 근무하는 생활을 계속 했었습니다.


그러던 중 2021년 2월 즈음 한 여성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여의도 정치권에서의 탈출을 생각했던 것은, 이 여성 때문이었죠. 이 여성은 수능 준비를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교대가 목표였던 사람이었죠.


뭐가 그렇게 좋았었는지, 저는 이 여성과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이라는게 참. 쉽지 않더군요. 근처에 결혼한 여의도 선배들 보면, 상대 부모님을 만났을 때 "뭐 해서 먹여살릴 거냐"라는 질문을 다 받았다고 합니다. 만약 제가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뭐 "노가다라도 뛰겠습니다~" 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결혼을 하겠다고 상대 부모님 앞에 갔을때 그런 질문을 별로 안 받고 싶었습니다. 궁색한 답변 말고, 좀 당당하게 결혼하겠다고 말하고 싶었거든요. 내가 이 여성을 위해서 이런 미친짓까지 해봤다, 하는 그런 각오를 보이고 싶었습니다. 결혼 상대로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싶었고요. 저는 아주 진지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이 참. 뭐랄까요. 저는 지나가다가 좋아보이는 아파트가 보이면 꼭 가격을 검색해 봅니다. "언젠가는 저 집을 사고 말겠다" 라는 생각으로요. 현실은 참 암담했죠. 제가 받던 실수령 월급이 300만원 중반정도 됐거든요. 제 회사 근처에 있던 좋아보이는 아파트는 가격이 16억. 연봉 상승이나 투자 수익이나 뭐 이런걸 다 배제하고서, 한푼 안쓰고 40년 쯤 모아야 살 수 있겠더라고요.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단숨에 폭주했습니다. 결혼하고 싶은 상대방에게 당당한 사람이 되어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내 젊음을 나라를 위해 써보겠다는 마음으로 들어간 정치판에서 저는 어느새 정책이 아닌 선거 기계가 되어있었고, 국민의 삶에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 그저 소속 정당이 선거에서 이기는 것에만 쓰임새가 있는 저 스스로에 대해 현타도 좀 찐하게 겪고 있던 참이었거든요.


2021년 2월 말부터 수능준비에 돌입했습니다. 뭐 사실 처음부터 그렇게 목표가 거창했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안되면 교대라도 간다는 생각이었구요. 최근의 수능 기출문제들을 풀어보면서 국어랑 영어는 아직 1등급이 충분히 가능한 실력이라는 것을 파악했습니다.


처음에 사탐을 그냥 볼지 어쩔지 고민을 좀 했는데, 돈이 별로 없어서 직장생활은 계속 했어야 했기 때문에 과탐을 할 시간은 없다고 판단되었고 사탐은 매우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수학만 파서 문과로 한의대를 뚫겠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뭐, 물론 그렇게 좋은 결과는 얻지 못했습니다. 22수능부터 수학이 합쳐지는 바람에 생각만큼 수학 성적이 나오지 않았고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던 사문도 망쳤거든요. 아무튼 22수능은 백분위 화작100 확통83 영어1 정법97 사문93으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원점수는 화작95 확통74 영어100 정법50 사문44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제가 쓴 다른 글에도 언급을 했지만 저는 3월 대선 직후 퇴직할 계획을 세우고는 미적/과탐에 도전하는 것으로 결심했습니다. 단순히 문과 경희한은 0.2%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이과 경희한은 1.0%정도면 진학이 가능한 것으로 나오길래, 0.2%보단 1.0%가 쉽겠지 하는 생각이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 느낌상 이과 1.0%보다 문과 0.2%가 훨씬 쉽습니다. 참고하시길.


아무튼 그렇게 일을 다니면서 수능공부를 병행하는 일상을 지속했습니다. 3월 대선 당일 퇴직의사를 밝혔으나, 여의도에서 저를 처음으로 거둬주신 분께서 퇴직을 간곡히 만류하셨고, 6월 지방선거까지만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퇴직을 미뤄버리게 되었습니다.(결국 퇴직은 8월에...) 그리고 그러던 중 제가 수능공부를 시작한 이유였던 여성과도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2022년 8월이 저에게는 참, 30년 넘게 살면서 가장 괴로웠던 한달로 기록될 것 같습니다. 수능공부에 스퍼트를 내고자 퇴직을 했고, 헤어진 여성에게서 코로나가 옮았고, 처음 걸린 코로나가 생각보다 엄청나게 괴로웠습니다. 코가 양쪽 다 막히고, 열은 40도를 찍고, 미각을 잃어버려서 몸이 정말 힘들었는데, 거기에 이별의 아픔까지 함께 견뎌내야만 했거든요.


이별로 인해서 저는 수능을 때려치울까 말까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됐습니다. 그 여성이 없었다면 저는 굳이 대학에 다시 갈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코로나로 거의 2주간을 누워서 아무것도 못했는데, 그동안 수능을 버릴지 말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뭐, 결론은 Go였습니다. 이 시련을 이겨낸 멋진 남성이 되어 다시 그 여성을 만나러 가고 싶었거든요.


그 다음부터는 저는 저를 잊었습니다. 쿠팡에서 5만원정도 하는 의지상자(정해진 시간이 되어야만 열리는)를 사서 핸드폰을 방해금지모드로 설정해놓고 그 속에 쳐박아두고 공부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일하고 연애도 하느라 공부가 많이 부족해서 매일매일 엄청난 양의 공부를 하면서도, 또 해야 할 더 엄청난 양의 공부에 기가 질리고, 우는 날도 참 많았습니다. 죽고 싶어질때쯤 되니까 수능날이 오더군요.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지, 저는 수능에서 찍맞의 힘을 빌려 10점을 더 먹었습니다(수학4점, 지구과학6점) 그래서 어찌저찌 메디컬에 간신히 진학할 성적을 얻었고, 지방한의대와 지방수의대에 합격했습니다. (수도권약은 불합)


합격한 이후로도 고민이 참 많았습니다. 이 학교를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2022년에 겪은 엄청난 마음의 고통으로 저는 이미 수능날 이후 뻗어버린 상태였고, 개강을 할때까지 거의 집에서 누워서만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직도 그 번아웃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진학을 포기하면, 위타지학했던 저 자신을, 그리고 죽도록 사랑했던 그 여성을 만났던 증거가 영영 사라질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결국 등록했습니다.


지금도 마음이 참 괴로운데, 이런 얘기를 어디다가 쓸 데가 없어서 넋두리 하는것처럼 이곳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공부를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세요. 누군가에겐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저는, 저희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그깟 여자때문에" 목숨을 내놓고 공부했거든요.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각자의 절실함이 다 있겠죠. 그걸 잊지 말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간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지 모릅니다. 저에게 10점의 찍맞이 있었던 것 처럼요.



큐브 QCC에도 썼었고, 다른 커뮤니티에도 썼던 글인데 오르비에도 올려봅니다 :)





0 XDK (+1,000)

  1. 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