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ck [320175] · MS 2009 · 쪽지

2011-10-19 01:48:41
조회수 1,708

방청소하다가 감성이 돋아서 하는 고등학교 시절 얘기

게시글 주소: https://ui.orbi.kr/0001893098

오르비를 너무 오랜만에 들어와서
그냥 정들었던 포럼에 올리는데요
게시판 성격에 안맞는 글이라고 생각하시면 어디로 냉큼 가라고 해주세요 ㅠㅠ
 
/
오랜만에
방청소를 하려는데
선반에 뭔가 종이 뭉텅이랑 파일철이 난잡하게 꽂혀있는게 눈에 띄었다
뭘까 저런걸 아직도 안치웠네...
해서 들어올렸더니
... 발등으로 종이가 우수수 떨어졌다
자기소개서였다.

/
서울대 많이 가고 싶었나보다
빽빽한 자기소개서가 한둘이 아니었다
밤늦게까지 책상에 앉아서 자기소개서 쓰던게 생각났다
잠이 많다는 핑계로 한시 이후에 자본 적이 없던 내가
처음으로
세시, 네시까지 잠 못이루면서 뭔가를 쓰고 있었다

코피가 나오려는건지 코끝이 찡하고 눈꺼풀은 무거웠지만
내겐 명문대 입학에 대한 책임감이 더 묵직하게 다가왔다

/
익숙한 스프링 노트가 보였다
두꺼운 노트 세 권
색깔만 다를 뿐 크기도 모양도 같다
안에 낙서하듯 필기된 내용도 모두 같다 수리영역 연습장이네

수학의 정석. 을 푼 흔적만 가득했다
1학년때는 고리타분하고 누가 저딴걸 보나 싶어서 쳐다도 안보다가
2학년 여름방학이었나
내가 가고 싶은 명문대 커트라인과 나의 격차는 원점수로 100점이상.
심리적으로는 넘사벽. 자신감이 무너져내려가던 그 때에 절망적인 심정으로 매달린 책이었다

정석책 옆면의 색이 손때가 묻어 점점 어두워지던.
그걸 낙으로 알고 그 노트를 채워냈다

/
파일을 열어보니 신문 스크랩이 가득했다
논술 필승전략.. 수험생의 올바른 공부자세.. 합격수기.. 이러면 승리할 수 있다...뭐..등등

하.. 지방 일반계 학생들은 참 불쌍하다
학교 선생님들은 옛날 얘기만 하고있고 아무것도 모르고 명문대 간 선배도 몇 없고

'왜
내가
혼자
알아서
해야하지?
저기요 아는사람 아무도 없어요?

왜 선생님들은 내가 Barron's AP 보고 있으면 딴짓하는 줄 아실까 모의고사나 잘보라실까
넌 왜 튀냐ㄱ...ㅗ 하라는대로는 안하냐ㄱ...ㅗ

'논술시험이 있댄다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건데 전북에는 시험장이 없네
'광주까지 가야지.. 힘들다
'KDI 경제경시다 와 큰 시험인데 아 서울가야되는구나
'오라니까 가야지...

'증권경시? 오 틈새시장인가 대전에서 보는구나 공부많이했으니까 장려상이라도 타겠지 ㅎㅎ
'어? 신분증이 어디갔지?
'저기 정말 죄송한데 신분증을 놓고 와서요 ㅠㅠ 팩스떴으니까요 지금 전송중이에요
'안됩니다. 규정이 ~ '...네? '응시 자격이 없습니다.

'AP시험장도 없어? 어떡하지.. 아 맞다 외고에선 많이 볼꺼야 외고에다가 전화해 봐야겠다
전화통 붙들고 전화하다가 한국외대부속외고에서 외부학생도 응시가 가능하다고 했다
'휴 다행이다 근데 외대부속외고가 어디지? 아 용인...용인외고

새벽 네시에 일어나서 새벽별보면서 밤새 갔다
손님은 우리뿐, 아무도 없는 빈 식당에서
부대찌개 먹었던게 지금도 기억난다

어차피 수능으로 온 거 생각하면
이 모든게 쓸모없는 짓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단순한 추억 이상으로 나한테 도움이 되는 일들이었다
이런 노력들은 자기소개서를 쓸 때 즈음에나 칭찬받았고 아니꼽게 보던 시선도 달라졌다
항상 친구들이랑 장난치고 사고치고 웃고 떠들었지만 이런 면에서는 좀 외로웠다

/
근데
...생각해보니까 다 혼자 한 일들은 아니네
지가 무슨 영웅이라고.. 다 도움 받았으면서 그런다

새벽까지 자기소개서 쓸 때는 엄마가 아들 글 쓴거 한번 봐주시겠다며 눈 비비면서 앉아계셨고
입학후 계속 떨어지는 성적에도 공부하라며 재촉하지 않고
걱정되셨을텐데도, 수능내신공부 외에 쓸데없는 걸 한다며 뭐라하지도 않으셨고
새벽에 뒷좌석에서 자고 있는 아들을 태우고 용인까지 데려가신 것도 부모님이었다

아들이 사춘기라고 수험생이라고 짜증부리고.. 다투고 나서도,

출근하기 전 말없이 아들 방에 신문 스크랩을 밀어넣으시던 분이 아빠였다. 

그것들은 모두, 혹여 공부하는 아들이 잠이라도 깰까봐 조심스레 밀어넣던 아빠의 손길을 한 번씩 거친 귀중한 자료들이었다


고대 면접날, 가을인데도 뜬금없는 한파로 유달리 추웠던 그 날, 기운내라면서 굳이 두분 같이 올라오셔서 응원해주시고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아들 등 뒤에 화이팅을 외치면서도
시간이 없다고 빵으로 끼니를 대충 때우게 한 것을 미안해하시던 그런 부모님이었다

푼다고 사 놓고 안푼 문제집이 반절은 됐는데 그것도 다 부모님 돈이었다

수능 시험날, 춥다며 핫팩이랑 따뜻한 도시락을 건네주던 손과 시험 끝내고 나온 아들을 반겨주던 그 손은 같은 손이었다
엄마는 그날 스트레스에 복통이 있었다고 하셨다 아빠는 일이 손에 안잡혔다고 하셨다
그 덕분인지 마음놓고 수능을 치렀다 아들 보는 시험을 자기 일보다 더 걱정하시는 그런 분들.

합격의 기쁨에 날뛸때도 부모님 품에 안겨서 폴짝폴짝 뛰었다
오랜만에 안아보는 부모님의 품은 따뜻했다

/
그 아들은 그때보다 조금 컸고 부모님들은 조금은, 작아지신 것 같다
선반위에 물건 좀 꺼내달라고 엄마가 부르셨다 내겐 높지 않은 높이였지만 엄마는 '우리 아들 키 진짜 크네 라고 하셨다
그렇게 안방을 나서는데 주무시고 계신 아빠의 침대가 조금 커 보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침대가 커진 것은 아닌 것 같다

내일이면 아빠는 가족들보다 한시간 일찍 일어나실 거다
아빠는
그렇게
자식들의 더 나은 교육환경을 위해서
한시간 거리의 학교에 출퇴근하셨다. 8년동안 그러셨다
초등학생으로 이사를 왔던 나는 벌써 대학생이 되었고 동생은 고등학생이 되었다
둘 다 많이 컸다. 8년동안
8년동안 아빠 등은 조금 작아진 것 같다

엄마는 체력이 좋지 못하시다
이제 곧 두달간의 단기휴직을 마치고 다음주부터 학교에 나가신다
반달동안 잠도 잘 못 주무시고 연금과 월급을 계산하시던 엄마는
계속 다녀야겠다는 결론을 내리시고 다음주부터 학교에 나가신다
곧 대학생이 둘인데 돈이 많이 나간다는 이유였다

접촉사고 이후 두달간 매일매일 물리치료 받으시던 몸을 이끌고 강단에 서신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애들을 키우는 일은 더 힘들다
부모님은 그 피곤하고 힘든 일을 둘 다 하고 계셨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
애매한 뻘글인데 어디다 올려야 할지 몰라서
옛날에 열심히 활동했던 게시판이라 올렸어요
공부는 혼자하는 싸움이 아니고
부모님도 함께하신다는 걸 느끼시면서
수험생 여러분 대학 잘 가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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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elly♥ · 341144 · 11/10/19 12:23 · MS 2010

    ㅠㅠ 으어 저도 부모님께 감사한데
    기대보다 열심히 안하는것 같아서 너무 죄송하고...

  • Rick · 320175 · 11/10/19 13:19 · MS 2009

    이제부터라도 기대에 부응하는 노력을 보이면 되죠 ㅎㅎ
    저도 수능 이후엔 열심히 살지 않은 것 같아서 이제라도 열심히 하려구요 ㅠ

  • 물고긔 · 374220 · 11/10/19 13:27 · MS 2017

    지금은 뭐하시고 계세요?

  • Rick · 320175 · 11/10/19 14:41 · MS 2009

    대학진학 후 휴학하고 공익근무하고 있습니다
    대학때는 신나게 놀기만 했는데 되돌아보니 조금 후회가 되네요

  • 스콜라 · 347354 · 11/10/19 18:19 · MS 2010

    반수하는 아이를 위해 도움이 될만한 정보가 있을까 하여
    이곳 저곳 기웃거리다가 이 글을 보게 되었네요..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귀하의 마음가짐 그 자체만으로 부모님의 베품에
    9할이상 보답하고 있다고 봅니다.
    귀하가 대학을 무사히 졸업하고, 귀하가 좋아하는 일을하면서
    행복한 삶을 살아갈때 나머지 1할이 채워질 것이라 봅니다.
    모든 수험생 여러분 다시한번 파이팅 하세요...

  • Rick · 320175 · 11/10/20 13:20 · MS 2009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자녀분 반수 꼭 성공해서 원하는 대학교 가시길 빌어요 ㅎㅎ
    저는 조금이라도 시간이 있을 때 부모님한테 잘해드려야겠어요
    원하는 대학 진학은 효도의 일부인 것 같아요 좀 큰 일부요
    이제 나머지 채워야죠 ㅎ

  • 잉여人 · 325879 · 11/10/21 18:50 · MS 2010

    원빈이다 원빈
    핑겅핑겅

  • Rick · 320175 · 11/10/22 21:02 · MS 2009

    아 ㅡㅡ 조때따 오르비 접어야지
    간만에 들어왔더니만

  • 잉여人 · 325879 · 11/10/21 18:51 · MS 2010

    선배님 글이 너무 좋아요^^

  • Rick · 320175 · 11/10/22 21:02 · MS 2009

    아...ㄴ..네.....